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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작(多作)/600 시청후감

침묵으로 증언하기, 부정으로 증명하기

by 오류동최주부 2020. 11. 22.

「나는 부정한다」(Denial, 2016) 시청후감 │2020.11.09

 

"모든 주장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선 안 된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존재한다."

2017년 5월 18일, JTBC 뉴스룸 앵커 브리핑. 손석희가 한 이 말은, 영화 「나는 부정한다」의 주인공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 분)의 대사를 인용한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지구가 둥근 것처럼, 홀로코스트도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다."

 

#1. 진실을 주장하다?

 

데이빗 어빙(티모시 스폴 분)은 홀로코스트가 존재했다는 자명한 사실을 거부한다. 오히려 "그녀(데보라)가 '홀로코스트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8살부터 히틀러를 추종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부정하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이다. 그로 인해 홀로코스트가 존재했다는 '진실'은 증명해야 할 '주장'이 되었다.

 

#2. 피고인,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라!

 

1996년, 어빙은 데보라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 홀로코스트의 증거를 가져올 수도 없으면서 자신을 모욕했다는 이유다. 당시 영국의 법은 미국과 달리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즉, 고소를 당한 피고인 데보라 자신이, 자신이 한 말―데이빗 어빙이 거짓이고 홀로코스트는 존재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증명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렇게 홀로코스트 희생자 6백만 명의 진실이 달린 '세기의 재판'은 시작되었다. 1996∼2000년에 걸친 4년간의 소송, 32번의 공판, 324페이지의 판결문, 실제 법정 기록을 그대로 재현해낸 뜨거운 진실 공방은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 앞에서 자신이 진실임을 끝없이 변호하는 매우 곤란한 과정이었다.

 

데보라는 힘겨운 모든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신께서 홀로코스트에 희생당한 모든 유대인을 구원할 기회를 주신 것으로 이해한다. 거짓에 맞서 역사를 지키고자 완벽한 드림팀이 구성된다. 다이애나 왕세자빈 이혼 소송을 맡았고, 영국의 브렉시트에 대항했던 '미쉬콘 드 레이아' 로펌은 이 소송에 뛰어들어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었다. 앤서니 줄리어스(앤드류 스캇 분)와 리처드 램프턴(톰 윌킨슨 분)은 결코 져서는 안 될 재판의 승리를 위해 합류한다.

 

#3. 나는 부정한다

 

변호인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승소 전략을 펼친다. 그 밑바닥에는 앤서니 줄리어스의 이 대사가 깔려있다. "사소한 사실 하나 입증이 안 된다고 '전부 의심합시다!' '나치는 살인한 적이 없어요!'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아예 말이 안 돼요." 진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섞여 있는 오류가 존재한다 해도, 그것이 진실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들의 승소 전략은 '부정을 부정하기'다.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어빙을 법정에 세운다. 다시 말해, 홀로코스트가 진실임을 증명하기보다 어빙의 주장이 거짓임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이 작전의 성공에는 한 가지 필요조건이 있다. 그것은 홀로코스트를 먼저 법정에서 끌어내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모든 진실의 목소리를 잠재워야 했다. 그들은 데보라 립스타트를 비롯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누구도 법정에 증인으로 세우지 않았다. 리처드 램프턴은 진실을 지키는 과정을 겪는 모든 이들이 결코 잊어선 안 될, 또는 꼭 지나야 하는, 한 가지 길을 내보인다.

"가만히 앉아서 입을 닫고 이기세요.
'자기 부인'이 필요하단 겁니다."

 

데보라는 ‘자기를 부정’한다. 그들 유대인에게 홀로코스트는 실존 그 자체였고, 진실은 언제나 선포되어야 한다. 홀로코스트라는 진실을 부정하거나 비난과 조롱하는 상대를 참아내기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하지만 데보라는 침묵했다. 우리는 진실에 헌신한다. 진실이 주장으로 왜곡되는 순간, 우리는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모든 주장을 동등하게 대우해선 안 된다. 진실을 부인하는 자들은 진실에 헌신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진실이라는 재료로 얻게 될 궁극적인 이익에 헌신한다. 그렇기에 진실의 편에 선 이들은 냉철함을 유지해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침묵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재판에만 헌신합니다." 앤서니 줄리어스의 이 대사는 진실을 지켜내기 위해 때로는 진실과 거리를 두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함을 알려 준다. 침묵은 오히려 진실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존재한다. 우리가 침묵해도 진실이 거짓이 되지 않는다. 데보라는 침묵했지만, 홀로코스트는 단 한 번도 침묵한 적이 없다.

 

"모든 주장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선 안 된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존재한다."

 

2000년 4월 11일, 데보라는 4년이라는 침묵을 깨뜨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하지만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7주년, 손석희는 이 말을 끌어 쓴 뒤 잠시 침묵한다. 홀로코스트는 이미 승소했지만, 광주는 아직 소송 중이다. 광주만일까. 일본 정부는 위안부를 강제연행한 증거가 없다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었다." 주장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 4.3 사건이 '국가에 의해 벌어진 대규모 희생'이라 밝히고 사과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폭동"이라고 주장한다. 거짓에 맞서 진실을 지켜낸 '세기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가 지금 대한민국 모두에게 필요한 이유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
거짓이 승리하는 것을.
진실이 침묵하는 것을.
나는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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