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후 두 번째 주일
[성서정과]
구약의 말씀. 이사야 62:1-5
시편의 말씀. 시편 36:5-10
서신서 말씀. 고린도전서 12:1-11
복음서 말씀. 요한복음 2:1-11
<요한복음 2:1-11, 새한글성경>
1 3일째 날에 갈릴래아의 가나에서 결혼 잔치가 있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셨다. 2 예수님과 제자들도 그 결혼 잔치에 초대받았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모자라게 되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한테 말한다. “포도주가 동이 났구나!”
4 그러자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말씀하신다. “저한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어머니? 아직 저의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
5 예수님의어머니가시중꾼들에게말한다.“그가여러분에게뭐라고말하든지그대로하세요.”
6 거기에는돌로만든물항아리여섯개가유대아사람들의정결예법에따라놓여있었다. 항아리 하나하나는 두 통 또는 세 통들이 크기였다.
7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물 항아리들을 물로 채우세요.” 그들이 물을 항아리마다 끝까지 채웠다.
8 그러자예수님이그들에게말씀하신다.“이제떠서잔치책임자에게가져다주세요.”그들이 가져다주었다.
9 잔치책임자가이미포도주가된그물을맛보았을때,그것이어디서난것인지는알지 못했다. 시중꾼들, 곧 그 물을 떠온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때 잔치 책임자가 신랑을 부른다.
10 그러고는 신랑에게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포도주를 맨 먼저 내놓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취했을 때 더 못한 것을 내놓지요. 그런데 그대는, 좋은 포도주를 아직까지 간직해 두었군요!”
11 징표들가운데이처음것을예수님이갈릴래아의가나에서행하여자신의영광을드러내셨다. 그래서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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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살전1:1)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전체를 한 마디로 선언합니다.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복음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그분의 사역은 명확하고 간결합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저는 오늘 요한의 복음서도 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읽어보려 합니다. 오늘 말씀 11절을 보시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사건을 ‘징표’라고 말합니다. ‘표징, 징표’로 번역되는 헬라어 ‘세미온’은 도로에 있는 표지판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역할을 하는 ‘표지판’을 의미합니다. 즉, <갈릴래아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벌어진 사건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포도주의 고갈-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봅시다. 갈릴래아 가나에서 결혼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도주가 부족합니다!!! 기후, 깨끗한 물 부족, 많은 하객, 오랜 고대 혼인 잔치 기간을 감안할 때, 이 결혼식에서 포도주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고 신랑 신부의 가족이 왜 충분한 포도주를 제공하지 못했는지 의아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심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행지식이 필요합니다.
첫째로, 당시에는 하객들이 큰 무리를 부양하는 부담을 분담하기 위해 음식과 음료의 형태로 결혼 선물을 가져오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따라서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가 부족하다는 말은 결혼 당사자들의 자원 부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지원의 부족을 의미했습니다.
둘째로, 가나는 유대 땅에 있지 않습니다. 갈릴리에 있습니 다. 당시 갈릴리는 도적, 정치적 반역자, 이방인으로 유명했습니다. 헤롯 대왕이 두 번이나 이 강도 지역을 소탕했을 만큼, 이 지역의 치안은 심각했습니다. 2018년 기준, 대한민국 다주택자 상위 10명의 1인당 평균 주택 보유량이 560가구로 집계됐다고 합니다. 당시라고 달랐을까요? 큰 포도원 주인들에게 땅을 약탈당한 사람들은 충분한 포도주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단지 이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확장해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말합니다. “포도주가 동이 났구나!”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합니다. “저한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어머니? 아직 저의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 위더링턴 이라는 신학자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것이 어머니께나 나에게 무슨 상관입 니까?”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모두 3인칭을 쓰면서 거리감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대화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직 저의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 즉, 이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가 고갈된 상황은 ‘아직 주님의 시간이 오지 않은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직 임하기 전의 세상’을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무 냉정하게 말씀하신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네 삶을 보면 그렇게 냉정하게 들리지도 않습니다. 내 결혼식도 아닌데, 남의 결혼식 음식이 떨어진 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 교회도 아닌데, 다른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내가 왜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문제들이요, 장애인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 외국인 노동자, 도시 빈민과 노숙인 문제, 젠더 갈등과 정치적 극단주의, 동물 보호와 환경 문제 등등이요. 이런 여러 주제들이 우리에게 던져지면, 우리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나요? “저한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이 침묵과 단절을 깨뜨리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에게 이렇게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오지라퍼 예수.’ ‘오지랖’은 한복에서 앞쪽의 겉섶 부분을 말합니 다. 흔히 오지랖은 ‘오지랖이 넓다’ 같은 부정적인 용어로 사용합니다. 오지랖이 넓으면 그만큼 매무새를 다듬을 때 간섭받고, 귀찮은 면이 있어서 그렇게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다르게 해석하면, 오지랖이 넓은 건, 그만큼 많은 면을 덮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같이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들은 차라리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 게 더 포근하고 좋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지랖이 의미하는 ‘개입 또는 간섭’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공감’이자 ‘덮어줌’을 의미합니다. 이제 주님이 침묵을 깨뜨리고 상황으로 들어가십니다. 개입하고 간섭하십니다. 다르게 말하면, 상황에 공감하고 덮어주기 위해 움직이십니다. 여러분,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습니다!”
<엄청난 양의 포도주를 만들다-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생명력>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 기적을 한 마디로 설명하면, ‘엄청난 양의 포도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기적을 통해 위태로웠던 결혼 잔치의 기쁨이 회복됩니다. 결혼 잔치의 이미지는 성경에서 이스라엘 회복의 그림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오늘 성서정과 중 구약의 말씀인 이사야 62장 1-5절 중 4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너를 두고 '버림받은 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너의 땅을 일컬어 '버림받은 아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너를 ‘헵시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이라고 부르고, 네 땅을 ‘쁄라-결혼한 여인’이라고 부를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너를 좋아하시며, 네 땅을 아내로 맞아 주는 신랑과 같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기적이 일으킨 결과는 단순히 결혼 잔치가 재개되는, 그 정도를 넘어섭니다. 아모스 9장 13절에는 “산마다 단 포도주가 흘러 나와서 모든 언덕에 흘러 넘칠 것”이라 말했고, 요엘 3장 18절은 “그날이 오면, 산마다 새 포도주가 넘쳐 흐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 말씀대로, 예수님이 변화시킨 포도주는 넘쳐 흘렀습니다.
항아리 하나가 두통 또는 세통 만큼이라고 했는데, 한 통이 39리터쯤 된다고 합니다. 계산해보면, 포도주의 양이 최소 450리터에서 최대 700리터까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생명력’을 봅니다. (2리터짜리 6개로 묶인 생수로 치면, 40묶음에서 60묶음 정도!)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한 개인의 삶을 회복시키는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를, 공동체를 구원합니다. 새 포도주,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생명에게로 흐릅니다.
<좋은 포도주를 아직까지 간직해 두었군요!-하나님 나라의 포용력>
10절을 보면, 포도주로 변한 물을 맛본 잔치 책임자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신랑에게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포도주를 맨 먼저 내놓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취했을 때 더 못한 것을 내놓지요. 그런데 그대는, 좋은 포도주를 아직까지 간직해 두었군요!” 이 말에 또 하나의 하나님 나라가 숨어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같은 식탁에 앉은 손님에게 음식과 포도주를 무차별적으로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음식과 포도주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맞게 제공되었습니다. 어떤 손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은 것과 같은 가장 싼 포도주(포도주, 식초, 물을 섞은 것)를 받았고(누가복음 23:36), 다른 손님은 그랑 리제르바(고급 와인에 붙는 라벨)를 마셨습니 다. 그런데 잔치 책임자는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를 ‘최고급’이라며 극찬합니다. 좋은 소식은 예수님의 포도주는 사회적 지위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포도주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큰 포도원 주인들에게 땅을 약탈당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가장 좋은 포도주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림은, 이렇게 모든 계층을 제거합니다. 오늘 성서정과 중 서신서 말씀인 고린도전서 12장 1-11절의 주제가 바로 이 지점을 잘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본문은 ‘같은 성령님이 나누어 주시는 여러 가지 은혜의 선물(은사)’에 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다’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성령님’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 각자가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만, 바울은 그 다양성보다 그 근원에 있는 ‘한 성령님’을 강조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유대아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고, 노예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성도 여성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3:28).”
이 사실은 예수님의 기적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 이 기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신랑도, 신부도, 잔치 책임자도 아니었습니다. 9절을 보면, 잔치 책임자는 포도주가 어디서 난 것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시중꾼들, 곧 그 물을 떠온 사람들만 알고 있었습니다. 잔치로부터 가장 먼 곳에 존재한 이들,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심에 존재합니다.
<3일째 날-이미와 아직 사이의 하나님 나라>
잔치 책임자의 말을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는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포도주를 맨 먼저 내놓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취했을 때 더 못한 것을 내놓지요. 그런데 그대는, 좋은 포도주를 아직까지 간직해 두었군요!”
사람은 누구나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습니다. 배부를 때 가장 좋은 음식을 내놓는 건, 먹는 사람도 괴로울 뿐 아니라, 음식 자체의 가치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잔치가 막바지로 다다를 때, 가장 좋은 포도주가 나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예언자를 보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최후에, 가장 좋은 포도주인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몸을 입고,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형태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세상에 오지라퍼 주님이 간섭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이미’와 ‘아직’입니다. 우리가 아는 찬양의 가사에도 있지요.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다스림을 맛보며 ‘아직’ 오지 않은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존재들입니다. 요한은 이 <갈릴래아 가나의 결혼 잔치>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앞으로 완성하실,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예상하고 안내하는 ‘표지판’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 그분의 다스림은 언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동이 났구나!” 말했을 때,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아직 저의 시간이 오지 않았다”라고.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딱 두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가나의 결혼 잔치고요, 두 번째는 요한복음 19장 25절에서입니다. 제가 읽어드릴게요.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다.”
“아직 저의 시간이 오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사라진 예수님의 어머니는 십자가 아래서 다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시간, 예수님께서 가장 영광 받으실 순간에, 그렇게 다시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 의 아들로서 예수님께서 가장 영광 받으신 순간을 ‘십자가에서’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 의 어머니는 예수님 사역 전체의 앞과 뒤에 수미쌍관으로 등장하며, 그분의 제자로서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참여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복음은 ‘오지라퍼 종결자 예수님’입니다. 오지랖을 떨다가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를, 이 세상을, 메말라버린 이 땅을, 더는 두고 보지 않으시겠다는 선언, 그 ‘사랑’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손님들이 들끓고 주인이 불안해하던, 잔치를 닫을 수밖에 없던,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조용히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곤경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에 의문을 제기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용한 기적은 때때로 하나님이 신문에 광고를 내지 않고 그의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그 결론을 뒤집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다 문득 지난 떠올랐습니다. 저도 이런 오지랖을 부린 적이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부활주일을 나흘 앞둔 수요일, 세월호가 가라앉았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요. 사람들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시다면, 좀 어떻게 해주세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극적인 구조는 없었습니다. 팽목항, 그곳엔 비명과 비탄만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곳에 정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을까요?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와 가장 먼 곳이었을까요? 어쩌면 제 인생에서 가장 오지랖을 부렸던 순간이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저는 신대원 3년을 9명의 미수습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삶 전체를 쏟아서 함께하진 못했습니다. 그저 필요한 순간, 빈자리를 채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목요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기회가 닿을 때는 팽목항에서, 목포 신항에서 예배를 드리고, 또 평일에는 청운동 주민센터와 홍대역 앞에서 한 시간씩 피켓을 들었고, 외쳤습니다.
‘아직 세월호에 사람이 있습니다. 9명의 미수습자가 있습니다. 다윤이, 은화, 현철이, 영인이, 고창석-양승진 선생님, 이영숙님, 권재근님과 아들 혁규가 있습니다.’
2017년 9월 23일, 다윤이와 은화의 기억식이 있기까지, 저와 제 친구들은 다윤이와 은화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삼십 년 동안 글로만 배운 예수님을, 또 하나님의 나라를, 그 시간을 통해 몸으로 겪으며 배웠습니다. 많은 사람이 세월호 사건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증명했다고 말하지만, 그곳에서도 이천 년 전, 갈릴래아의 가나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조용한 기적이 있었습니다. 잔치는 아니었지 만, 웃음보다 더 깊은 의미의 교제와 공감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오지랖인 것 같은데, 그곳에서 저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본문의 첫 두 마디입니다. ‘3일째 날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무너뜨려 보아라. 그러면 내가 3일 안에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요 2:19).” 3일째 날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신 뒤, 3일째 날에, 우리는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3일째 날, 하나님께서는 무너진 모든 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겁니다. 그렇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참여하는 한 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종들에게 했던 그 말로요.
“그가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하든지 그대로 하세요.”
오지라퍼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우리가 할 일은 그 나라가 언제 와도 이상하지 않게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준비는, 우리가 그렇게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걷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일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오지라퍼가 되어, 그 공동체적인 필요와 빈곤을 공감하고 덮어나가는 일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 주간,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두길 원합니다. 그분이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하든지, 그 말을 잘 듣고, 그대로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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