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8:1-3, 5-6, 8-10 / 시 19 / 고전 12:12-31a / 눅 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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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예수님이 성령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갈릴래아로 돌아오셨다.
예수님의 소문이 둘레 온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15 예수님이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모두에게 영광을 받으셨다.
16 ● 예수님은 나사렛으로 가셨다. 예수님이 자라나신 곳이었다.
늘 해 오시던 대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소리 내어 읽어 주려고 일어서셨다.
17 예수님께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내드리자,
예수님이 그 두루마리를 펼쳐서 이렇게 적혀 있는 곳을 찾으셨다.
18 “주님의 영이 내 위에 계시네.
나에게 기름 부으셨기 때문이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하심이네.
주님이 나를 보내셨네.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해방을,
앞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도록 하심이네.
짓눌린 사람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도록 하심이네.
19 주님의 은혜로 받아 주시는 해를 선포하도록 하심이네.”
20 예수님은 두루마리 책을 말아서 회당 시중꾼에게 돌려주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이 예수님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21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여기에 적힌 이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이 두 귀로 들은 대로입니다.”
(새한글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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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살전 1:1)
<갈릴래아 가나 결혼 잔치>
우리는 교회력과 성서정과에 따라 매주 주어진 말씀을 봉독하고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주현절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심”을 기념하면서 보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갈릴래아 가나 결혼잔치에서 펼치신 오지라퍼 예수님의 화려한 데뷔전을 살펴보았습니다.
갈릴래아 가나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가 동이 났고, 그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엄청난 양의 포도주를 만들어 낸 사건’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자원과 사회적 지원이 모두 고갈된 상황, 그 상황에서 만들어 낸 엄청난 양의 포도주, 이것을 우리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표지판으로 읽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450리터! 하나님의 나라, 그분의 다스림이 임할 때, 주님은 한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정도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개인을 넘어 사회 공동체 전체의 갈증을 해결하십니다. 돌이켜보니, 이 간단한 이야기를 30분에 걸쳐 설명했었네요. 오늘 말씀 또한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 그 ‘풍성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의 하나님 나라(1)>
지난 주일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사역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사역을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이 기적을 일으켰다면, 누가복음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신학자들은 이 본문을 ‘예수님의 취임사’로 표현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누가복음의 하나님 나라(1)’입니다. (1)을 붙였다는 말은 (2)가 있다는 뜻이겠죠. 사실 오늘 본문은 21절에서 끝났지만, 30절까지가 전체-한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이 ‘취임사, 취임 설교’라면, 다음 주일 말씀은 그 취임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개념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하고, 다음 주는 그 하나님 나라를 현실에서 살아내는 실제적인 어려움에 관해 나누려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오늘 제목에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이라는 수식어입니다. 이 부분은 설명이 조금 필요합니다. 누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누가복음 서론(1:1-4)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 놓으신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 내려고 많은 사람들이 손을 댔습니다. 처음부터 직접 본 사람들과 말씀의 시중꾼 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꼭 그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나도 시작점부터 모든 것을 꼼꼼히 따라가 보았으므로, 존귀하신 테오피로스님, 어르신을 위해 차근차근 써 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디모데후서 3:16, 마태복음 5:18 / 축자영감설, 문자주의, 창조과학
여러분은 우리가 읽는 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성경을 쓸 때의 모습을 어떻게 상상하시나요?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말씀대로, “모든 성경 다 하나님이 숨(영감)을 불어넣으신” 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까지는 점 하나, 획 하나도 율법에서 사라지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마태복음 5장 18절 말씀을 덧붙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축자영감설’을 주장했습니다. 축자영감설이란 ‘성서는 글자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단 한 글자도 한 문장도 틀림이 없으며, 이로 인해 오류가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성경관입니다. 흔히, 깨끗이 몸을 씻고, 펜을 들면,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서, 한 자 한 자 써나가는 그림을 그린다면, 여러분은 축자적 영감설에 가까운 상상을 하고 계신 겁니다.
‘축자영감설’을 가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문자주의’와 연결됩니다. 문자주의자들은 성경에 나온 모든 기록을 역사적 배경이나 그 의미가 아니라 ‘문자에 기록된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창조과학’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하나의 흐름입니다. 성경은 무오, 오류가 없으니, 그대로 과학적으로 읽고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들은 단순 명료해서 쉽게 이해되고 전파됩니다만, 우리는 이렇게 성경을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 모두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데서 출발한 주장들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성경이 무오하다’ 주장합니다. 말 그대로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축자영감설’이나 ‘문자주의’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서론은 이 주장이 ‘틀린 것’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읽은 것처럼,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기 전에 이미 복음서를 기록한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복음서를 참고해서 썼다고 말하고요. 한 자 한 자 받아쓰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인격과 역사가로서 자질을 사용해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자료를 모으고 편집하는 과정을 통해, 누가는 이 복음서를 썼습니다.
vs. 성경무오설(내적 조명)
저는 가끔 이런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창세기 1장 1절을 끌어옵니다. 성경 전체의 첫 마디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러분, 성경의 첫 번째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곧 성경의 주인공-유일한 관심사-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과학책도 역사책도 아닙니다. 객관적 사실 검증이요? 그건 근대의 산물이고요, 성경이 쓰이던 시대 사람들은 신화적 세계관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라고요? 성경은 당연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것 외에 관심 없습니다.
성경은 각 시대에,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남긴 기록입니다. 당연히, 성경은 그런 시대적 한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오’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한계를 가진 인간들이 시대 시대마다 자신들이 경험한 하나님을 고백하며 기록으로 남겼고, 이 책에서 그런 하나님 경험을 배우기엔 아무런 오(誤, 어긋남)도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무오하다는) ‘성경무오설’은 하나님께서 누가에게, 그리고 그가 책을 쓰는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일 점, 일 획도 오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누가가 쓴 이 책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어긋남 없이 잘 담아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저희가 새한글성경을 읽었지만,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여러 개의 번역본이 있는 것만 보아도, ‘일 점 일 획도’라는 구호가 얼마나 현실적이지 않은, 허구적인 개념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미 존재한 복음서를 참고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새로운 복음서를 썼습니다. 어떤 책들은 한 사람의 저작이지만, 대부분은 공동체가 오랜 시간을 들여 편집한 책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모든 책이 저마다의 캐릭터를 가지고 기록되었고,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지요. 그래서 네 복음서를 읽어보면, 저마다 경험한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게, 자신의 스타일로 풀어냅니다.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서 편집과정>
이제 본격적으로 누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자신만의 예수님과 그분이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지 살펴볼까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시는데요, 여기서 누가는 예수님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내용을 조금 수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읽으신 이사야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계시네. 나에게 기름 부으셨기 때문이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하심이네. 주님이 나를 보내셨네.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해방을, 앞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도록 하심이네. 짓눌린 사람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도록 하심이네. 19 주님의 은혜로 받아 주시는 해를 선포하도록 하심이네.”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2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크게 세 부분을 수정합니다. 먼저,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고치시며’라는 부분을 뺍니다. 그리고 이사야서는 ‘주님의 은혜의 해와 함께 보복의 날도 선포’하는데, 이 내용도 뺍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서 58장 6절에서 한 구절을 덧붙입니다. “짓눌린 사람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도록 하심이네.” 이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 세 부분을 보면, 누가가 예수님과 이 이사야서 말씀을 어떻게 연결하고 해석하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복음에서만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는 것이지요.
먼저, 첫 번째와 세 번째 수정은 누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인 ‘역전’과 관련을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역전’이란 가난한 자가 부요하게 되고, 부요한 자가 가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임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이 세상의 질서가 완전히 뒤집히는 경험을 합니다. 이 모티프를 끌고 가기 위해, 누가는 ‘마음이 상한’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빼고요, 외적으로 구분이 가능한-가난한 사람들, 포로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앞 못 보는 사람들 등-조건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한다’에서 “가난한 사람들ptochois(프토코이스)”은 유명한 마태복음의 팔복처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가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 살 집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가난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주님의 은혜로 받아 주시는 해를 선포하도록 하심이네.’에서 “은혜dekton”로 번역된 dektos(덱토스)는 실제적인 행동인 ‘받아들임/포옹’을 뜻하는 동사적 형용사입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당시 죄인으로 분류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 없던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런 모두를 받아들이신다고, 오히려 그런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와 더 가까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모든 제외된 사람을 끌어 모으십니다.
이렇게 보면, ‘보복의 날’이라는 구절을 뺀 이유도 예상할 수 있겠죠. 누가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배제’가 아닌 ‘포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은 세상이 그어놓은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두를 받아들여 주시는 하나님을 전하셨습니다. ‘보복의 날’을 빼면서, 누가는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배제당하는 사람 하나 없이, 그 어떤 조건에 있는 사람도 다 들어갈 수 있는 포용의 나라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전통적으로 교회는 ‘주님의 은혜로 받아 주시는 해’를 구약성경의 ‘희년’과 연결해서 읽었습니다. 희년은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지낸 다음 해인 ‘50년이 되는 해’에 선포되고 실행되는 법인데요, 50년 동안 인간의 욕망으로 흐트러진 모든 사회적인 질서를 처음 상태로 되돌리는 날입니다. 심지어 땅까지도 포함해서, 모두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지난주일 요한복음의 예수님이 ‘오지라퍼, 예수’였다면, 이번주일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라인 브레이커, 예수’라고요.
주님은 인간이 그어놓은 모든 선을 허물어뜨립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읽으신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당시에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다고 대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어!’라고 확신 있게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이 그어놓은 모든 선을 허뭅니다. 우리가 가장 확신에 차서, ‘저 사람들은 죄인이야!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이야!’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친구라고 부르고, 그 사람들이 죄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다 포용합니다.
오늘 성서정과 구약 말씀인 느헤미야 8장을 보면, 누가복음의 예수님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수문 앞 광장에 모입니다. 그리고 에스라에게 말씀을 읽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하면, 옆에 있던 레위인들이 그 말씀을 해석해 줬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울었다.”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레위인들의 잘못된 해석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죄 때문인데, 그 죄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그들이 제시한 것은 ‘가부장적 순혈주의’였습니다. 쉽게 말해, 이방인과 교류해서 망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모든 이방인들을 쫓아냅니다. 말씀을 듣고 싶어 나갔는데, 멀쩡한 가족들이 생이별을 해야 했던 겁니다. 이런 잘못된 맥락으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일이 예수님 시대까지 남아있었습니다. 뉴스너(Neusner: 85-86)라는 학자는 주후 70년 이전의 모든 바리새인의 문헌 자료를 검토한 뒤에, 그중 3분의 2가 음식, 사람, 접시의 제의적 정결에 초점을 맞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방인, 고넬료 이야기인데요, 사도행전 10장 28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들도 아시다시피 유대아 사람에게는 다른 민족 사람과 어울리거나 그 집에 찾아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그 집에 찾아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보여주시며, 그런 베드로의 생각을 깨뜨리시죠.
베드로는 하나님과 논쟁을 했고, 그 후 말합니다. “참으로 나는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겉모습을 보고 차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느 민족에 속하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아(δεκτό, 덱토스) 주십니다.” 당시의 편견을 허물고,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세례를 줍니다. 여기서 ‘받아 주십니다’에서 사용된 단어가 ‘덱토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은혜로 받아 주시는 해’와 같은 단어입니다.
물론, 여전히 사람들은 이런 베드로를 아니꼽게 보았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한테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먹었다지요.” 베드로는 항변합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나서서 구별되지 않은 것으로 만들지 마라!’
오늘 성서정과 서신서 말씀인 고린도전서 12:12-31a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몸이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우리도 서로 다르지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됨으로써 세례와 성령을 받아 한 몸이 된다고 말한다.
바울의 주요 논지는 이렇습니다. (a) 전반적 논지는, 구성원의 엄청난 다양성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일 뿐 아니라 전체의 행복에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더 약하게(asthenestera)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또 따라서 더 큰 영예를 누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다양성의 수용(12:14-20)을 위해서는 상호 의존의 필요성을 인정(21-26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c)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혼합 구성체’인 것에다 신적 질서-세례와 성찬례를 통해서-를 부여한 목적은, “몸 가운데서 분쟁(schisma)이 없[게]” 하는 것이고, 그 논리적 귀결로 구성원이 서로를 “같이”(the same) 돌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을 받을 때든 희열을 느낄 때든 근원적으로 동료와 공감하고 연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계시네. 나에게 기름 부으셨기 때문이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하심이네.
주님이 나를 보내셨네.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해방을,
앞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도록 하심이네.
짓눌린 사람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도록 하심이네.
주님의 은혜로 받아 주시는 해를 선포하도록 하심이네.”
다시 한번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그리스어 ptochoi)으로 번역된 단어는 경제적 지위뿐 아니라, 지위를 낮게 만드는 1세기 세계의 다른 요인들-성, 계통, 교육, 직업, 질병, 장애, 종교적 정결 같은 요인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다양한 이유로 인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 전체를 의미하는 차원의 가난한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결정된 경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바로 이러한 "외부자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의 특별한 대상이라고 주장합니다.
에베소서는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님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시민권하고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약속의 언약들 바깥에 있는 낯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희망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때는 멀리 있었지만, 그리스도님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님이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님이 양측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양측을 가르는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적대 관계를 자신의 몸으로 허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나 결혼잔치에서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와 같습니다. 온 공동체로 흐르고 또 흐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선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 한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한 식탁에 앉힙니다. 오늘 밤을 보낼 곳 없는 사람들, 강제노동에 동원된 사람들, 장애인, 고통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을 포용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래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습니다.
예수님이 두루마리 책을 말아서 돌려주고 앉으셨습니다. 회당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적힌 이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이 두 귀로 들은 대로입니다.”
주현절,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념하는 기간, 오늘 우리는 어디서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기에 적힌 이 말씀이 오늘 어딘가에서 이루어진다면, 여러분이 두 귀로 들은 이 말씀이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고, 그곳에 주님은 나타나 계십니다. 양 끝을 하나로 만드는 곳, 양측을 가르는 장벽이 허물어지는 곳, 외부자들을 적대하는 것을 멈추고, 그 적대 관계를 자신의 몸으로 허무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경험할 것입니다.
오지라퍼 예수님께서, 이젠 우리와 우리 사회가 그어놓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십니다. 라인 브레이커 예수님께서, 그분의 나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복음인 이유는, 그곳에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곳에 우리의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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